Tokyo, 1989
 
시간의 퇴적, 풍경의 해골
성완경, 1998
 

내가 박홍천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제2회 광주비엔날레 <권력> 부문 전시 준비를 하던 작년 봄이었다. 내가 본 사진들은 그가 1994년 과천 서울대공원과 용인 자연농원(현재의 에버랜드)등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같은 해 한마당갤러리에서 <앨리스에게>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첫 개인전 사진들이라고 했다. 첫눈에 나는 그 사진들의 회화적 깊이와 비범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비범함은 느리고도 신중한, 그리고 확고한 작업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울러 내용면에서도 어떤 분명한 기질이나 선택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또는 관점이 느껴졌다. 특히 나는 색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색채가 단순히 검은 필터를 써서 미량의 빛만을 허용한 장시간 노출이라는 ‘방법’의 결과라기 보다는 그의 서두르지 않는 끈기와 비범한 ‘눈’의 결과 임을 나는 나중에 그가 89년 도쿄에서 찍었던 초기 사진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의 사진들 대부분은 색상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짙은 검정색 필터를 써서 아주 긴 노출 시간을 주어 찍은 사진들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30분 혹은 한 시간의 노광으로 한 장면을 찍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필름의 색소별 발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무거운 색조를 띤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하루 종일 노출시켜 찍은 사진도 있다. 장시간 노출 중 움직이는 물체는 기록되지 않거나 희미하게 중첩된 흔적으로만 남고 정지해 있는 것들은 그것들대로 미세하고 무겁고 깊은 톤으로 고정된다.

“…움직이는 피사체는 기록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오가는 행인들과 마차로 혼잡했을 그 큰 길은 구두를 닦고 있었던 한 사람만을 빼놓고는 완전히 텅 비었다. 그 사람은 구두통 위에 한 쪽 발을 올려놓은 채, 다른 발은 길바닥에 디디고서 한동안 꼼짝없이 서 있었을 터이므로, 결국 멋대로 움직였던 몸통과 다리는 새겨지지 않고, 구두와 다리만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박홍천의 사진은 160년 전 사진 초창기에 다게레오타입으로 찍은 파리 거리 사진을 보고 미국의 화가이자 발명가 사무레 모르스(Samuel Morse)가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박홍천의 사진들에서 사람의 모습은 지워져 있거나 혹은 한낮의 초승달처럼 허공에 그 일부만 희미하게 떠 있다. 사람들이 많은 유원지 같은 장소의 경우, 형체 없는 무수한 군중들의 움직임이 더러운 흙먼지 바람이나 스모그처럼 지면 가까이 희미한 자국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아주 초창기의 다게레오타입은 긴 노출시간이라는 아직 해결 못한 결함 때문에 초상 사진을 기대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이로 인해 다게레오타입의 인기가 한때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었다. 초기에 사진 기술의 개량 노력은 그래서 노출 시간의 단축에 집중되어 있었다. 의도적인 긴 노출로 사진에서 사람의 실재감과 스냅 사진의 생기를 지워내는 박홍천의 사진은 이 점에서 옛날로 거꾸로 돌아가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퇴행으로 박홍천은 오히려 매혹적인 깊이와 중량감을 획득하고 있다.

박홍천의 사진은 빠름과 순간의 사진이 아니라, 느림과 지구(持久)의 사진이다. 19세기 중엽 나다르(Nadar)나 까르자(Carjat)가 찍은 초상사진들이 그 긴 노출 시간 때문에 오히려 인물에 있어 심오한 내면 표정이 나타나듯이, 박홍천은 그 느림과 지구의 전략으로 풍경에 깊은 내면성을 부여한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풍경에 깃들여 있은 죽음의 아우라를 잡아낸다. 아니 풍경에 죽음의 아우라를 씌운다. 풍경을 유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미량으로 억제된 광선의 점진적 퇴적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색조에 의해 달성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색조는 더 무겁고 착잡하고 퇴락한 것이 되며, 심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인물이 사라져 버림으로써 묘지 같은 무겁고 막막한 기운이 돈다. 박홍천의 사진은 모든 가시성의 현재형 위에 이 같은 죽음의 반투명 막을 씌운다. 그것은 질식된 풍경이고 산소가 희박해진 대기, 묵시록적 시간 속으로 가라앉은 풍경이다. 현재는 사이언스 픽션처럼 다른 시간 속으로 표류되어 낯선 표정을 띤다.

장시간 노출로 사람을 포함한 움직이는 모든 것의 흔적이 지워진 인적 없는 인공물들의 황량한 풍경 그 하나만으로도 그 같은 느낌은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시선을 자연농원이나 서울대공원 같은 인위적 문화 위락 시설 쪽으로 옮기면, 더욱 쉽사리 풍경 속에 깃들여 있는 죽음과 폐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말하자면 박홍천은 그가 시간을 길게 늘여 조절하는 이 가시성의 장치를 통해서 풍경 속의 죽음의 구조, 풍경의 해골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문명 비판적 시각, 사이언스 픽션적 시간이 종교적 초월적 시간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사진술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면서도 동시에 빛의 소멸에 관한 예술이며, 피사체의 존재에 의존하는 예술이면서도 또한 그 피사체의 죽음에 더욱 크게 의존하는 예술이다. 사진의 힘은 존재의 스러짐에, 죽음에, 다시 말해 시간의 무자비한 권력에 의존해 있다. 사진은 또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형식이자 존재와 시간의 본성에 대한 사색의 더없이 중요한 언어이다.

"호주에 있는 동안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내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지만, 죽음의 문제는 초기부터 나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간혹 내 사진이 너무 미학적인 예쁜 사진이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진에 보편적이고 무거운 주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죽음이라는 주제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중요한 주제다. 그런데 죽음은 반드시 무거운 것만이 아니라, 매혹적인 것일 수도 있다."

박홍천은 96년부터 1년 4개월 동안 호주에 머물다 돌아왔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을 가져와 비엔날레 기간 중 샘터화랑에서 개인전으로 전시했다. 이 사진들은 정방형의 화면을 거의 채우고 있는 하늘과 그 아래로 꿈꾸는 듯, 그러나 무겁고 낮게 깔린 녹청색으로부터 갈색•녹회색•납빛으로 변하는 바다를 찍은 것이었다. 화면 구석에는 비어 있은 벤치나 산책 길, 식물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간혹 사람들의 희미한 자취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오랜 인류의 문학 전통 속에서, 특히 호머의 서사시에서 바다는 기억과 시간의 상징이었다. 바다가 흔히 여성성으로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홍천은 10년 전에 돌아가신, 작가가 그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며 카메라를 바다로 들이댔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그것은 어머니의 체취가 점차 옅어짐에 따라 태아적 기억까지 더듬기 위함이었을까?

박홍천이 누적시키는 시간의 궤적은 삼각대 위의 고정된 카메라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1993년 <비무장지대작업전>에 출품한 사진들은 사진기를 자신이 운전하는 차의 앞쪽을 향하여 고정시킨 채 편도 2차선 고속도로를 30분 동안 달리며 찍은 사진이다. 개념예술가들의 비디오 액션과도 비슷한 이 스틸 카메라 액션의 결과로서, 끝없이 평행을 이루며 달리고 있는 차선들의 흔적과 앞서 지나간 차량들의 흔적이 흐릿하고 몽롱하게 화면 위에 누적되어 있다. 분단의 현실을 은유하고자 한 이 개념 예술적이고 거의 절망적인 사진 액션에서 우리는 박홍천의 작업이 단순히 예쁜 미학적 사진이 아닌 그 속에 현실의 거죽을 넘어서는 날카로운 현실주의자의 시선과 개념주의자적 사고 구조까지 함축하고 있음을 충격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나는 거리의 공사장 담벽에서 자주 보던 '혼을 다한 시공'이란 말에서 혼을 다한 관료주의 언어의 불길한 유령을 보게 되었다. 이 말은 시멘트에 붙은 머리카락이나 핏자국의 연상과 더불어 사람의 '혼백'을 버무려 넣은, 죽음을 버무려 넣은 시공이란 말로써 나에게 읽힌다. 악몽이다. 그러나 앗제(Atget)가 찍은 인적 없는 파리의 거리 사진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이 범죄 현장의 정적을 읽은 이래로, 아니 사진의 발명 이래로, 그 어떤 한 장의 사진도 죽음의 현장이 아닌 사진이 있었던가. 박홍천의 매혹적인 사진은 머리카락조차 없어진 깊은 시간의 정적으로 가시성의 구조물 어디에서나 죽음의 권력을 읽게 해준다. 그것은 종교처럼 조용하다.

 

- 월간미술, 1998. 8.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성완경은 광주 비엔날레의 국제전 커미셔너 (1995년, 1997년) 및 예술감독 (2002년)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임하고 있다.